모래에 묻히는 개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저린 가슴으로 읽은 후 오랜만에 나의 서양미술순례기를 뽑아 다시 읽었다. 6장의 중반쯤인가를 읽으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룍의 서쪽 끝에 있는 반도를 달리는 밤기차 속에서 새삼스럽게 나는 멀리 동쪽 끝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우리의 ‘반도’를 생각했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가 되지만, 대개는 맥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 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두꺼운 구세력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시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쁘라도 미술관이 내 마음을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벨라스께스나 고야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이 간단치 않은 이해를 무조건 강요받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에서 거의 300년간 계속되어온 종교재판이 폐지된 것은 1834년이 되어서의 일이다. 스페인의 권위주의적인 전제체제는 간단히 말해서 1936년에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었던 한때를 제외하고는 결국 프랑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것이다.
 한데 우리 ‘반도’ 사정은 어떤가……
 이런 생각을 하며 멍청해 있으려니 객실의 천장 구석이며 도어의 그늘진 곳, 혹은 차창 너머 어둠 속에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는 괴이하고 불길한 무엇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차 속의 무료함을 잊었다. 그들이란 바로 벨라스께스의 난쟁이와 광대들, 혹은 또 고야의 「제 자식을 먹는 사투르누스」 「주먹질」 「마녀의 잔치」 따위 ‘검은 그림’의 갖가지 이미지들이다. ‘검은 그림’ 씨리즈 속에 한 점의 이색적인 개 그림이 있다. 「물살을 거스르는 개」 또는 「모래에 묻히는 개」라고 불린다. 보기에 따라서 급류를 허겁지겁 헤엄쳐 건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사(流砂)의 개미 지옥에 삼켜져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 개는 나라고 생각했다.”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나의 서양미술순례. 창작과 비평사,1991)

굵은 글씨의 대목에서 눈물이 왈칵 나올 뻔했다. 이제는 이방의 땅에서 디아스포라로 몇몇 사람들이 겨우 사람의 온기를 만들어가며 버티고 있었지만, 내가 살았던 그 땅이 침잠되어가는 모습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난 그 6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 개가 나라는 생각’에 결국 울고 말았다. 세상을 뒤집겠다는 기개는 고사하고 하루하루 살아남기가 버거운 인생을 살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서경식이 이 책을 썼던 91년 나는 스무살의 청년이었다. 백주대낮에 쇠파이프에 머리가 깨져 죽은 강경대가 내 동기였다. 물론 다른 학교를 다니는 얼굴도 몰랐던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동갑이었다. 공권력이 말 그대로 백주대낮에 살인을 하고 다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었다. 내 20대는 경대에 대한 죄책감과 공권력에 대한 분노로 흘러갔다.

벌써 그게 18년전 이야기인데, 여전히 공권력은 백주대낮에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눈을 깔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가정의 가장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있다. 난 인터넷을 통해 그 광경을 그냥 지켜볼 뿐이다. 그냥 끝까지 울면서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지켜볼 뿐이다.

김규항이 블로그에 “상식의 이름으로”라는 한겨레신문 연재 칼럼을 올렸다. (링크)

싸움은 지속되고 있지만, 그 소중한 싸움의 성과를 엉뚱한 놈들이 독식하는 슬픈 역사 또한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이른바 상식의 이름으로.

소중한 싸움의 성과가 잠식 된것은 사실이지만, 난 왠지 서경식의 편을 들고 싶다. 그 희생이 열매를 맺고 있다고, 느리고 힘들지만 여전히 한 발씩 나아가고 있다고, 김규항 같은 글쟁이들의 채찍질이 세상을 좀 더 계급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그래서 나도 모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개 신세이지만 오늘도 이런 글을 적고 있고, 내일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 온기가 살아있는 디아스포라를 만드리라 다짐한다.

여름인데도 엘에이는 서늘하다.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비라도 한 번 내려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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