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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이 아버지

남들이 삼천배 한다고 내 백팔배가 쉬울 꺼라는 만용이 몰락의 시작이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며 밤새 용맹정진하는 불자들의 모습이 “완전 멋있다”고 생각하다가 그 나무아미타불의 나선에 빨려들고 말았다. ‘삼천배야 못하지만, 백팔배 정도는 문제없겠지’라고 생각해선 안되는 중년의 사내였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니 허벅지에 전해져 오는 고통이 장난 아니었다. 허리 근육도 놀랐는지 절뚝이며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왔다.

정오에는 처갓집 식구들과 추석 맞이 점심 식사를 동네 중국집에서 하기로 했었다. 산 중턱에 있는 집에서 나와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요즘 아빠를 띄엄띄엄 보는 자식들이 업어달라고 말도 안되는 생떼를 썼다. 초5 딸과 초3 아들을 내가 어찌 업는단 말이냐.

“둘이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은 업어주지”라고 공갈치고 빠져나오려는데, 아들이 가위바위보를 이기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백팔배에 파열된 허벅지 근육은 내리막길에서 그 위용을 더해가고 있었다. 애비 얼굴을 자주 볼 수 없으니 보고 있을 때라도 살을 부비고 싶은 아들 마음이 짠해 “업혀”라고 해버렸다.

한 30미터나 업어주려다가 그만 식당까지 5분길을 업고 내려왔다. 등에 매달려 목에 팔을 감고 얼굴을 부비는 아들을 내려놓기 싫었다. 파열된 허벅지 근육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광화문 농성장에는 지지자도 오고 반대세력도 오고 술먹은 지지자도 오고 술먹은 반대세력도 온다. 누가 와서 사고를 쳐도 그 자리를 수습하는 것은 상황실장을 맡고 있는 영석이 아버지다. 영석이 아버지는 오랜 거리 생활에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 독자를 잃고 거리에 선지 백일하고도 한 달이 넘었으니 속은 더 까맣게 탔을 것이다.

후들거리는 다리, 저려오는 팔로 아들을 업고 걷는데, 그 까만 얼굴이 떠올랐다. 새까맣게 멍든 손톱, 무언가라도 잡으려고 움켜쥔 손가락을 한 영석이를 5일만에 찾았다는 이야기를 하던 그 까만 얼굴. 자식을 묻으려해도 묻을 곳도 묻어야 할 이유도 모른 채 모든 진실을 결국은 드러내게 하고야만다는 태양 아래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국집 건물에 도착해 2층까진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아들은 거기서 내리겠다고 했다. 영석이 아버지는 다신 만질 수 없는 그 아들이 내 등에 업혀 있었다. 백팔배에 후들거리는 중년의 다리였지만 난 아들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난 이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다. 태양 아래 진실이 다 드러날 때까지 이 싸움은 멈춰선 안된다. 이미 잃은 사람들도 싸우고 있는데,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우리는 어디에 서있는 것인가.

모래에 묻히는 개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저린 가슴으로 읽은 후 오랜만에 나의 서양미술순례기를 뽑아 다시 읽었다. 6장의 중반쯤인가를 읽으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룍의 서쪽 끝에 있는 반도를 달리는 밤기차 속에서 새삼스럽게 나는 멀리 동쪽 끝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우리의 ‘반도’를 생각했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가 되지만, 대개는 맥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 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두꺼운 구세력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시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쁘라도 미술관이 내 마음을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벨라스께스나 고야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이 간단치 않은 이해를 무조건 강요받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에서 거의 300년간 계속되어온 종교재판이 폐지된 것은 1834년이 되어서의 일이다. 스페인의 권위주의적인 전제체제는 간단히 말해서 1936년에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었던 한때를 제외하고는 결국 프랑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것이다.
 한데 우리 ‘반도’ 사정은 어떤가……
 이런 생각을 하며 멍청해 있으려니 객실의 천장 구석이며 도어의 그늘진 곳, 혹은 차창 너머 어둠 속에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는 괴이하고 불길한 무엇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차 속의 무료함을 잊었다. 그들이란 바로 벨라스께스의 난쟁이와 광대들, 혹은 또 고야의 「제 자식을 먹는 사투르누스」 「주먹질」 「마녀의 잔치」 따위 ‘검은 그림’의 갖가지 이미지들이다. ‘검은 그림’ 씨리즈 속에 한 점의 이색적인 개 그림이 있다. 「물살을 거스르는 개」 또는 「모래에 묻히는 개」라고 불린다. 보기에 따라서 급류를 허겁지겁 헤엄쳐 건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사(流砂)의 개미 지옥에 삼켜져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 개는 나라고 생각했다.”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나의 서양미술순례. 창작과 비평사,1991)

굵은 글씨의 대목에서 눈물이 왈칵 나올 뻔했다. 이제는 이방의 땅에서 디아스포라로 몇몇 사람들이 겨우 사람의 온기를 만들어가며 버티고 있었지만, 내가 살았던 그 땅이 침잠되어가는 모습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난 그 6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 개가 나라는 생각’에 결국 울고 말았다. 세상을 뒤집겠다는 기개는 고사하고 하루하루 살아남기가 버거운 인생을 살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서경식이 이 책을 썼던 91년 나는 스무살의 청년이었다. 백주대낮에 쇠파이프에 머리가 깨져 죽은 강경대가 내 동기였다. 물론 다른 학교를 다니는 얼굴도 몰랐던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동갑이었다. 공권력이 말 그대로 백주대낮에 살인을 하고 다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었다. 내 20대는 경대에 대한 죄책감과 공권력에 대한 분노로 흘러갔다.

벌써 그게 18년전 이야기인데, 여전히 공권력은 백주대낮에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눈을 깔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가정의 가장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있다. 난 인터넷을 통해 그 광경을 그냥 지켜볼 뿐이다. 그냥 끝까지 울면서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지켜볼 뿐이다.

김규항이 블로그에 “상식의 이름으로”라는 한겨레신문 연재 칼럼을 올렸다. (링크)

싸움은 지속되고 있지만, 그 소중한 싸움의 성과를 엉뚱한 놈들이 독식하는 슬픈 역사 또한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이른바 상식의 이름으로.

소중한 싸움의 성과가 잠식 된것은 사실이지만, 난 왠지 서경식의 편을 들고 싶다. 그 희생이 열매를 맺고 있다고, 느리고 힘들지만 여전히 한 발씩 나아가고 있다고, 김규항 같은 글쟁이들의 채찍질이 세상을 좀 더 계급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그래서 나도 모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개 신세이지만 오늘도 이런 글을 적고 있고, 내일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 온기가 살아있는 디아스포라를 만드리라 다짐한다.

여름인데도 엘에이는 서늘하다.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비라도 한 번 내려주면 좋겠다.